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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ry or episode

가을, 이동의 계절

by plover 2009. 11. 1.

시월 이십사일, 그곳에 살면서 그들을 보아온 이에게 물었다.

"왔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예사롭게 대답했다.

"아직 안왔고, 빠르면 시월 이십팔일에 선발대가 도착해요."

가던 길을 되돌려 산새를 보러 산사로 갔다.

그리고 나흘 뒤인 10월 28일에 그들은 도착했다.

쉰세 마리가 먼저 왔다.

야조회 홈페이지에는 이미 도착했거나 남하중인 흑두루미의 궤적이 그려져 있었다.

해평습지, 강화, 천수만, 순천만, 낙동강하구.

각각의 지명은 더 남쪽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화살표를 빠짐없이가지고 있었다.

 

 

창고가 있어 차를 숨기고 덤불속으로 기어갔다.

풀만큼 키를 낮추고 렌즈를 통해 새들을 봤다.

박무속 정역광을 받으며 목을 길게 뽑거나 둥글게 구부리고 있는 커다란 새들.

실키한 은회색 깃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문양을 새겨넣고,

풍성한 깃 코사지를 연상시키는 꼬리깃이 멋들어지다.

우아하다.

이 말이 더 어울리는 무엇이 있을까.

 

가을은 이동의 계절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징표는 무수히 많다.

 

 

이동은 준비를 의미한다.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끼는남자들은 가을이면 이동에의 욕구로 몸살을 앓는다.

 

 

떠나온 새와 떠나고자 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새들은 목적지를 또렷이 알고 있다. 부럽게도.

 

 

 

 

태초의 시간에로의 귀환을 꿈꾸거나

피안에의 막연한 향수로 눈물 글썽이는

가을을 타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과 이 햇빛과 바람과 길의 계절에

떠나 온 새들을 환히 보든가,

떠나 갈 새들에게 기름진 들깨를 나누어 준 후든가,

오늘처럼 스산한 어느 저녁이든가,

라흐마니노프 아무 피아노협주곡이나 걸어놓고 같이 좀 취하고싶다.

 

 

 

 

 

 

해질녘, 북쪽으로 부터 한 가족으로 보이는 네 마리가 날아왔다.

잠시 후 일곱 마리가 더 왔다.

이제 여든 여섯이 되었다.

오늘은 어떨까?

더이상 갈 곳이 없어 보이는 낙동강하구에 도착한 새들에게도 남쪽을 가르키는 화살표가 붙어 있다.

5000 마리의 흑두루미 중300 마리 내외가 이 땅에서 겨울을 나고 나머지는다시 바다를 건너 간다.

 

 

 

하지만 더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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