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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the past looks forward to the present

by plover 2010. 3. 2.

 

 

2009년 12월 아바타가 나타났다. 그 때는 어디에 있었던가?

꿈, 광활한 대지 위에 커다란 괘종시계 하나가 서 있다.

빛은 시계의 앞면을 비추고 뒤로는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 안에서의 고독과 우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시간은 과거다. 현재는 부피가 없으며 미래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부분 어둡고 무거운 것들이지만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시간은 책과 같다. 켜를 이루고 쌓여있는 무기물질을 펼치면 빛이 된다.

작은 방이 있다. 책과 음반들이 세 벽면에서 저마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방문을 연다. 냄새가 난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둥글게 웅크리고 있음을 느낀다.

기다림도 외로움이나 슬픔처럼 냄새를 가지고 있다. 음반들이 여러 겹으로 쌓여있는 곳을 본다.

거기 기억 속의 담배연기처럼 희미한 음들이 뭉글거리고 있다. 가슴을 가져간다.

세로로 얇게 서있는 음반들이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처럼 환해진다.

이윽고 집게 손가락이 한 모서리에 닿으면 둘의 심장이 각기 즐거움과 초조함으로 뛰기 시작한다.

다만 하나의 모서리 혹은 면이었던 기억이 유쾌한 직각삼각형이 되었다가 알맞은 크기의 사각 평면의 빛이 된다.

그렇다, 빛.

 

 

 

 

 

 

과거의 과거는 망각을 위한 것이 더 많았다.

정치와 교육이 개인의 시간을 함부로 사용한 나머지 시간에게 단절과 표백은 가장 큰 미덕이었다.

삼백 기가바이트의 하드 디스크, 일백이십 기가바이트의 휴대 저장장치, 포터블 컴퓨터의 일백 기가바이트의

기억저장고들이 가득 찼다.

서랍 속에는 범람으로 어쩔 수 없이 옮겨온 또 다른 기억들을 갈무리한 둥근 플라스틱 도구들로 가득하다.

그 메모리를 신문으로 펼치면 지구를 몇 번 덮을 수 있다는 말 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아련한 옛추억,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 만을 그리워하거나 신봉하기 때문이다.

가을, 다람쥐와 동고비는 겨울이라는 미래를 위해 먹이를 저장하느라 내내 바쁘다.

매번 다른 장소에 숨겨둔다. 이윽고 하얀 눈이 두텁게 쌓이는 시간이 찾아 왔을 때 숨긴 것들을 찾아 보지만

눈에 뒤덮인 그 장소를 찾는 것은 새로운 먹이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다.

동굴 가득, 틈새 빽빽하게 쌓아둔 도토리와 씨앗들 위에서 배를 곯는다. 심지어 굶어 죽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다람쥐와 동고비가 찾아내지 못한 열매들은 이듬해 봄 한 무더기 무성한 싻이라도 틔워올린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신이 되어 있었다. 시간을 있게도 없게도 할 수 있는 꽤 유능한 신.

그는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장면과 상황마다 고개를 드는 수치심과 비굴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새것이라 일컫겠는가? 이 문구라도 머리맡에 붙여두고 살지는 않았을까?

아바타, 그 캐릭터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고양이 인간보다 신선할 것도 개성적일 것도 없었다.

판도라, 미야자키 하야호가 편편에 그려오다가 마침내 모노노케 히메와 천공의 성 라퓨타를 통해

바위에 손가락으로 새기듯 그려놓은 자연에 다른 것은 없었다.

모두들 찬탄해 마지않는 I see you.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어록 어디 쯤에나올 법한 말이었다.

전 편을 관통하여 흐르는 교감, 우리네 할머니의 만물에 대한 경외와 겸손에 더 절실할 것도 없었다.

그의 모방은 너무도 뚜렷해서 보는 이가 부끄러웠고 치명적으로 아름다워서 경악하였고

그럼에도 오감에 거스르는 법이 없어 마침내 눈물이 흐른다.

영화관을 휘청휘청 걸어 나오며 떠오르는 몇몇 감독과 작가들이 느꼈을 좌절을 생각하며 한숨쉬었다.

파스칼 로제가 물의 희롱을 두드린다. 토란잎에서 물방울이 구른다. 파문이 일어난다.

실개천이 굽이굽이 돌아 흐른다. 손이 물에 젖는다. 들리니 보인다. 온통 빛이다.

벽면 가득 무심상하게 쌓여있는 음반 중 하나를 손가락에 지긋이 힘을 주어 마침내 뽑아내듯이

제임스 카메룬은 과거와 기억, 꿈에게 빛을 주었다.

시간은 빛이다. 빛이 못된 시간, 그것이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과거와 같은 과거의 이유로 그의 사랑스러움을 해하지 말자.

좋은 것은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태양 아래 온전히 새것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측량키 힘든 거대한 기억장치를 소유한 이가 신이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는 비로소 신이 되었다.

시계 뒷면의 무거운 어둠 속에서 나와 앞으로 가기, 책과 음반에게 빛을 주기,

검고 단단한 하드디스크를 빛의 속도로 구동시켜 빛을 뿜어내기.

눈에 덮였던 열매는 눈이 사라지면 생명으로 솟구쳐 오른다. 행복하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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