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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꽃이 피었다

by plover 2008. 2. 9.

Deep Purple의 Smoke On The Water를 들을 때면 생각이 난다. 뜨거운 방바닥, 차가운 실내공기 그리고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담배연기... 친구 한 명은 문옆에서 안쪽을 보며 앉아 있고, 다른 친구는 오디오 가까운 곳에서 담배를 끼운 손가락으로 볼륨을 조절하고 있다. 나는 벽에 기대어 허리를 조금 앞으로 구부린 상태로 듣고 있다. 간헐적으로 우퍼가 맹렬히 진동할 때면 조그만 쪽유리창을 통해 비쳐드는 빛줄기 속의 담배연기가 싱크로나이즈하 듯 일제히 앞 뒤로 흔들린다.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온 몸을 때리며 귀를 파고든다. 어느새 폐부에도 음악이 가득 찬 듯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가청 한계에 가까운 큰 소리에는 제어할 수 없는 희열이 따른 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음악과 그림, 영화와 독서 그리고 대화를 분위기와 함께 떠올리고 추억하는 다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고1 겨울방학의 한 스냅이다. 꽃이 피었다. 난초 하나가 꽃을 피웠다. 꼽아 보았다.  20 년이 넘었다니! 내 손에 건너와서 집과 몸을 따라다니다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얼굴 같은 꽃을 들여다본다.'태랑'이라고 불렀던 잘 생긴 청년이 보이고 그의 수줍고 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산능선의 붉은 황토가 밟히는가 하면 함부로 쌓인 낙엽이 등산화를 덮는다. 반구대, 가파르게 경사진 산 비탈에 셋은 짝다리를 짚고 참나무에 몸을 반쯤 의지한 채 두 촉의 난초가 내민 선명한 복륜 무늬 꽃봉오리에 감탄하고 있다. 물기 빠진 주름진 구근 두 개를 얻어다 심었다. 바늘같이 여린 잎으로 몇 해를 보내다 불어나기 시작해서 여러 지인들에게 분주를 할 때까지도 꽃을 피우지 않더니 입춘에 맞춰 가슴 활짝 열고 인사를 한다. "20 년 만입니다. 내가 지독하게 어렵게 꽃을 준비하는 동안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 " 하고 물어 온다. 대답 대신 사진이나 몇 컷 찍어준다. 때가 되면 꽃이 피는 것들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때가 되어도 꽃이 피지 않는 것들은? 30년이 더 된 헌 음악 한 곡과 20년도 더 전에 만난 난초 한 포기가 추억으로 심금을 울리고 세월의 강철같음을 일깨우는 2월이다. 저 난은 이제 내년에도 꽃을 피우겠지. 선순환의 도도한 물살은 쉬 막을 수 없는 법이니까. 벌써 2월이다.

 

춘란, 복륜 + 복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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