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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추일서정을 읊조리다

by plover 2008. 11. 18.

 

 



하구의 청회색 얕은 바다 위를 달린다.

마지막 한 방울 기름까지 꽃과 잎으로 밀어 올리며 철사 빛으로 익고 있는 갈대밭 사이를 지난다.

그 위로 큰고니 한 가족이 천천히 내려온다.

이어서 쇠오리떼가 가랑닢처럼 우수수 일어난다.

어느 방향이든 늦은 오후의 일광을 잔뜩 머금은 채 날아갈 듯이 부풀어 오른 억새 프레임 뒤로

세상은 저 만큼 물러나 있다.

딸이 카메라를 메고 가는 아비의 뒷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앞에는 하얀 빛을 내뿜는 바다가뻗어 있다.

아이는 제 아비 앞에 펼쳐진 풍경이 이전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 여인이 천천히 뒤따르며 온화한 표정으로 그들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날 낯선 길을 지난다.

키 큰 마로니에가 길 양 옆에 우우 몰려서서 노랑 물감를 퍼붓고 있다.

차도 사람도 색에 젖는다.

부드러움속에 모두를 감추고 무거운 세월을 견디는 사람

스승 같은 여인과 함께 차를 내린다.

싸아한 공기,은행과 마로니에가 펼치는 마지막 화려한 향연에 마음을 맡긴다.

어디선가 이글 이글 빨갛게 익은 감이 제 무게를 못이기고 떨어진다.

 

 

 

낙엽은 폴란드...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속을 맴돌며 입술을 오물거리게 하는 것은

....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

 

 

가을이 왔다고 여기는 내내

기어이 소리내어 읊조리고 싶었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던가?

 

 



무모한 초청을 뉴질랜드 와인 한 병과 단풍잎 처럼 붉은 책 한 권으로 화답받은 여행.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위트와 패러독스와 더티토크 그리고 짧은 낯선 침묵들.

6차선 고속도로가 들길 같았다.

 

 



마침내 머리를 찾았다.

늘 그러했 듯 뜻밖의 샛길 탐사에서 영탄사들이 흐른다.

거기서 '추일서정' 한 두 대목을 수줍게 읊조려 버릴 수 있었다.

배설이었다.

어떤 희미한 연도 없을 법한 온전한 낯설음이 주는 선물,  짧으나 신비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유연한 의식의 흐름이 죽은조르바가 생각나게 했다.

창문틀을 부여잡고 먼 곳을 응시하며 죽는 죽음이란 현실의 그것이 아닐 것이라며

자꾸만 예수처럼 그를 부활시키고 있었다.

 

 



한 친구가 몇일 전에 멱살 드잡이를 하며 싸움을 했노라고 했다.

도무지 상상이 안되는 어색한 이야기를 신명나게 들려 주었다.

그가 설득하지 못할 일도 있던가?

아직도 그와 누군가와의 싸움은 비현실 같다.

그러나 개펄이 펼치는 빛의 연회를 앞에 두고서야 싸움 이야기도 통쾌할 뿐이었다.

 

 

 



이렇듯 정교한 조화와 균형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루어진 새들은 삶을 무어라 여기며

그 먼 길을 무서운 기류에 날개를 의지하고 다치거나 죽어가며 오가는 것인가?

한 친구가 말한다.

 

"새들은 참 바보다.

세상에 널린 것이 먹이인데 굶어서 죽는 새가 대부분이라니!

적당히 가까운 곳에서 계절을 넘기고 살면 될텐데 기를 쓰고 먼 곳까지 오다니!"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나 중국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너무도 가볍게 떨어지는 생명들에 의아해 하다가 화를 내다가 마침내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삶에서 길이란 의미가 없으며 거기는 단지 무수한 해퍼닝들이 있고 죽음은 그 중 하나일 뿐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죽음은 칠흑같이 어두운 무엇이라 여겨 진저리 치며 무서워하곤 했다.

죽음을 가까운 곳에 두고 있는 듯한 노인들의 태연함을 볼 때는 이상하다고 생각 했다.

새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

 

 

 



비켜갈 수 없는 길이 있다.

일러 무엇 하리.

새들의 행로 그 멀고 험난한 여정을 신비롭다고 하지만 우리네 삶도 높은 곳에서 조망하며 한 편의 영화처럼 돌려 보면

이상하거나 무모하거나 신비로울 것이다.

 


 

 

한 친구는읽던 책을 싸가지고 와서 붉게 펼쳐 놓았다. 다른 친구는 할 얘기가 잔뜩 담긴 포도주를 꺼냈다. 그리고 나는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혼자서는 다 삭일 수 없는 당신들의 힘을 빌려서야 느낌을 완성하고 대화의 전반부 나마 마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인 시켜주고 싶었을 것이다.

 


 입술 끝에서나 오물거리던  추일서정은 흑두루미들의 의미심장한 노래소리와 투명한 바람을 검은 색으로 보여주는 유연한 날개짓과 땅위에 두 다리로 서 있든 하늘 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있든 쉬 확인되는 그들의 극진한 우정, 개펄 끝간 데까지 늘어서 있던 가을의 빛과 색 그리고 이야기로 완성되고 있었다.

 


 


 

 

 

 

 



 잊지않겠네 그대들이 있어 지극했던 추일서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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