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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

새들의 시간

by plover 2008. 10. 26.

 

 

시간은 과거다.

그를 이제야 깨닫는다.

손가락 틈으로 흘러나간 모래알이 남긴 희미한 간지러움 같은 과거.

하지만 그 궤적은 때때로 단단한 모래알같이 차가운 또렷함이다.

 

 

 



 

 

지난 한 주 나는 그리고 당신에게 있어 시간은 무엇이었나?

새들에게 있어 그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전장에 질펀한 핏물처럼

낙동강 하구 모래섬에는 시간의 궤적이 널려 있었다.

아직 붓을 들지 않은 화가 앞에 펼쳐진 캔버스같이 온전한 여백의 땅, 세가락도요, 좀도요, 흰죽지꼬마물떼새...

그들의 아찔한 가벼움이 눌러놓은 꽃잎같은 발자국조차 핏자국인 양 선연했다.

 

 

 



 

 

 

오해와 모멸, 증오와 한숨을 바둑의 포석처럼 빼곡히 놓아 온 한 주 동안

세 마리의 넓적부리도요새는 겨울을 날 곳을 찾아 떠났고

늦은 출산의 흔적을 까맣게 칠한 채 민물도요 수백 마리가 자궁같은 시베리아로부터 도착해 있었다.

몽골, 게르 내부를진동하더라는 양고기 노린내가 날 듯한 솔개도 서른 마리 쯤 와서바다를 익히고 있었다.

아, 아침이 밝아 오는 서쪽 하늘로부터 하구의 세모고랭이 밭으로 날아오는 큰고니 한 가족, 여섯 마리도 있었다.

그들에게 축복이 있으라.

 

 

 

 

 


기나 긴 비행으로 지쳤던가?

숨죽인 채 자고있던 좀도요들.

조개 껍데기 널부러진 모래,인식 불가의 시간.

눈을 감음으로 해서 영겁의 사물들과 일체가 되어버린 새들곁에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의식의 흐름이든 의식의 끈이든 아무것도 흐르지도 나풀대지도 않았다.

새들에게 다가 갔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비로소 모든 것을 털퍼덕 내려 놓을 수 있는 곳.

 

 



 

 

 

시간은 흐르기도 멈추기도 한다.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하등의 의미도 없어 보이는 시간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단단하고 차가운 모래알처럼 깔끄러운 인식의 그것이며

상처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피의 흐름일 수 있다.

 

 



 

 

가늠 해보니 나의 1주일이 그들에게는 대략 3개월이다.

열흘이 하루와 같은 것이다.

내가 슬퍼하고 짜증내고 한숨 쉬는 동안

15센티, 세 마리의 새는 미얀마까지 단숨에 날아 갔고

여섯 마리의 큰고니는 밤과 새벽을 뚫고 낙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펄럭 펄럭 느릿한 날개를 쉴 사이없이 흔들어 솔개들은 몽골을 아득히 뒤로하고 떠나 왔다.

늦은 부화의 고충을 견뎌 낸 민물도요들이 이제 막 도착해서 죽음같이 피로한 잠을 자고 있다.

 



 

 

시간은 과거다.

그래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봐라.

그 시간들이 어떠한 지를.

새들의 시간,

무한의 두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애당초 시간에는 길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두께가 있을 뿐이다.

작은 새들이 고요히 찍고 간 가벼우나 또렷한 발자국에 고인 시간.

그것들은 녹슬어 사라지는 쇠같고

전사가 남긴 발자국에 고인 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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